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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2014.03.21

계속해서 카페기사 언니의 빈정거림을 들으면서

왜 내가 저런 사람에게 무시를 당해야 하지? 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정화스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나 또한 대상을 똑같은 눈으로 보고 있었구나...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딱 맞아 떨어지는 거다.

결국 내가 두려워하던 타인들의 시선이라는 게 내가 타인을 보는 시선과 일치했다.

그 시선에서 자유로워지기 이전에 나의 타인을 향한 시선을 바꾸는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남의 돈 벌기 정말 쉽지않다.

사장님한테 싫은 소리 듣지 않기 위해 일을 잘하는 알바생이 되긴 싫다.

하지만 결국 싫은 소리를 듣게 하는 나의 행동이란게 어떻게 보면 내 한계일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위해 노력을 한번 해보는건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사주명리학으로 해석하면 극은 없고 생만 있는 형국이 요즘의 세태라 할 수 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없고 편하게 키워주기만 하니, 버릇이 없어지고 응석을 부리거나 한없이 의존적인 인간형만 양산된다. 생은 극이 동반되어야 진정한 '살림'이 된다.

강철은 불덩이에 달궈지고 수없이 두들겨 맞아야 단단해 지듯이 통과의례라는 극을 통해야 인간은 거듭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환생하는 것이다.

모험여행과 같은 통과의례를 마치고 돌아온 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존재이다.

고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미와 키스가 아니라 보릿고개와 같은 혹독한 통과의례다.

잃어버린 통과의례를 스스로 만들어 볼 수도 있다.

당장 모험여행을 떠나거나, 사막으로 달려가도 좋겠지만 반드시 똑같이 할 필요는 없다.

성인이 된다는 것의 핵심은 시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체의 조성이다.

이것은 보릿고개가 주는 결핍으로 인한 고통과 유사하다.

아니, 그럼 무작정 굶으란 말인가? 옛사람들이 그랬듯이 씀바귀라도 씹으면서 스스로 기아 체험이라도 하란 것인가? 아니다. 결핍을 절절히 체험하면서 동시에 충만해지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씀바귀 못지않게 쓰디쓰면서 속이 얼얼해지고 혼이 쏙 빠져버리지만, 제대로 소화시키면 아이에서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것은 욕을 '쳐먹는 일'이다.

 

절기서당을 읽고 이 부분을 암송했다.

바로 다음날인 오늘 사장님을 비롯해 여러사람들에게 욕을 쳐먹게 되었다.

아직 시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체가 아니라 도저히 소화시킬 수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이 모든 시련들이 나를 성인이 되는 길로 인도해주는구나 하고 생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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