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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의 안녕하지 못한 주류 여성성의 폭력

서희정 2013. 6. 12. 23:32

 

“너는 왜 머리 안 길러?” 귀밑 오 센티를 채 넘지 않는 머리 스타일을 고수해온지 어언 4년째. 그동안 만나왔던 남자들은 연애 시작 후 한 달을 참지 못하고 한결같이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짧은 머리가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답하면 그들은 단번에 알아먹지 못하고 끈질기게 응수하곤 했다. “다른 여자애들은 다 머리 기르잖아. 너도 머리 기르면 안 돼?” 연애 초반임을 감안해서 한 번 더 인내심을 발휘한다. 머리가 짧으면 내 흘러넘치는 볼살이 그나마 덜 부각된다고, 더욱 친절하고 자세하게 답한다. 그러나 그들은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고 앵무새처럼 좀 전의 질문을 반복한다. “긴 머리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머리 기르면 안 돼?”

ⓒKBS


“머리 기르는 건 못 하겠고 살은 뺄게요.” 지난 5월 6일 KBS2TV 예능프로그램 ‘대국민토크쇼 안녕하세요’(이하 ‘안녕하세요’)에 출연한 ‘상남자딸’은 고민사연을 보낸 어머니와 그렇게 타협(?)을 맺었다. 오랫동안 짧은 머리와 긴 바지, 남자다운 행동을 고수해왔던 딸이 ‘남자에서 여자로’ 한발 나아간 모습에 패널들과 방청객들은 아낌없는 박수와 함께 고민 응원의 버튼을 무수히 눌러댄다. 요란한 버튼음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앉아있는 딸의 모습에서 구남친들의 질문공세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나를 발견한다. 왜 우리는 ‘여자’가 되어야만 하는가?

일반인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예능프로그램인 ‘안녕하세요’에서는 주류적 여성성에 부합하지 않아 불안해하는 생물학적 여성들이 고민 사연의 주인공으로 심심찮게 등장해왔다. 지난 1월 14일 ‘초딩은 나의 적’이라는 제목의 사연을 들고 등장한 일반인 출연자는 또래 스무 살 여성들보다 어리고 왜소해 보여 자신을 초등학생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토로한다. 4월 1일 ‘이젠 달라지고 싶어요’이라는 제목의 사연의 주인공이었던 또 다른 출연자는 뭇여성들보다 큰 덩치와 남자다운 스타일로 인해 남자로 종종 오해받는 것은 물론, 소개팅 자리에서는 상대 남성이 그녀를 보자마자 자리를 떴다면서 한숨을 쉰다. 구체적인 맥락과 상황은 저마다 다르지만, 불안의 중심에 자신을 ‘여자’로 보아주지 않는 사회의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사연에 대처하는 프로그램 연출진의 태도가 매번 똑같다는 점이다. 연출진은 그들의 고민을 주의 깊게 들어주며 동정하는 척 하다가 이내 돌변하여 주류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포용하지 못하는 고민 당사자들을 달래거나 질책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은 단연 코미디언 이영자이다. 그녀는 ‘화장은 익숙하지 않아서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는 출연자에게 ‘근데 사랑하고 싶잖아! 그럼 뭘 내놔야지!’라고 윽박지르며 그들의 개인적인 노력이 부족한 탓에 그러한 고민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영자 본인 역시 비만한 몸집 탓에 여성성 이데올로기에 편입되지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자신의 지위를 희화화하는 대표적인 연예인이라는 점이다. 여성성 이데올로기의 적극적 담지자인 동시에 서글픈 희생자라는, 웃지 못 할 이중성을 직업적 웃음으로 승화시켜야만 하는 이영자는 담론의 폭력성을 지적하는 대신 오히려 이성애자 남성과의 연애, 사랑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 정당성을 강조하고 담론에 포섭되지 못하는 고민 당사자들에게 ‘여자’가 되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할 것을 종용한다. 남자 진행자들은 이 모습을 지켜보며 말없이 웃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연출진은 고민의 주인공들을 ‘변신’시켜주겠다며 그들을 스튜디오 밖으로 끌고 나간다. 잠시 후 고민 당사자들은 긴 머리 가발과 화사한 원피스, 굽 높은 구두를 신고 나타난다. 진행자들은 달라진 그녀들을 향해 찬탄을 아끼지 않고, 이윽고 이어지는 무수한 고민응원의 버튼음 세례는 그녀들의 변신의 정당화에 정점을 찍는다. 고민의 배후에 있던 여성성 이데올로기는 ‘응원’이라는 이름 뒤안에서 또다시 스스로를 능숙하게 은폐한다.

‘여성’은 언뜻 그저 생물학적 특성에 기반을 둔 중립적인 호명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일상 곳곳을 지배하는 권력관계의 중심축으로서 강력하게 작동한다. 특히 오랫동안 정신/육체의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관념 질서 하에서 정신이 결여된 육체적 존재로만 여겨져 왔던 여성들은 자신의 육체를 통해서만 그 존재의의를 증명할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공공연히 시달려왔다. 긴 머리와 날씬한 몸매, 화장한 얼굴과 원피스 옷차림 등으로 표상되는 주류 여성성의 군림 하에서 또 다른 외양과 옷차림을 통해 나만의 고유한 섹슈얼리티를 추구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주류 여성성에 대한 배신은 곧 주류 사회에 대한 배신이자 전복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정된 섹슈얼리티의 경계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여성들이 ‘안녕하세요’에서, 그리고 오늘날 사회에서 결코 안녕할 수 없는 이유다.

 

20대 대표언론 ,고함20